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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강의

1. 구한말 개화기의 역사적 상황

(1) 열강의 도전과 대원군의 쇄국정책

19세기 중반부터 서구 열강들의 문호 개방 요구가 거셌다. 그러나 그 당시 조선인들의 인식은 단순해서 서구인 = 오랑캐였다. 그래서 프랑스와의 병인양요(1866), 미국과의 신미양요(1871) 등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원군은 오랑캐들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길은 굳게 문을 닫아 거는 것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소위 쇄국정책을 폈다.

이러는 가운데 조선의 국력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갈수록 뒤처져 갔다. 그래서 결국

조선은 열강들이 패권을 다투는 놀이터가 되었다.

 

(2) 개화파의 움직임과 일본의 진출

한편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근대화시키려는 선각자들이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를 비롯한 양반 출신의 개화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대원군의 뒤를 이은 고종에게 나라의 개혁을 요구하고 고종은 수락하였다. 하지만 이들 개화파들은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 청나라, 조선 중에 진정한 의미에서 확실한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일본은 일찍이 서양 문물을 순조롭게 받아들였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새롭게 함으로써 비약적으로 국력을 신장시켰다.

일본과 청나라, 조선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개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세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든 개혁을 하려고 하면 수구 세력들의 반발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본은 강력한 시민 계급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개혁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은 그러한 시민 계급이 없었다. 그나마 청나라는 조선처럼 쇄국 하지 않고 개방 정책을 폈기에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근대화와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고려 시대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 귀족과 평민으로 양분되어 평민들의 신분 상승은 요원하였다. 과거 제도가 있었지만 음서제라 하여 귀족의 자제들은 일찌감치 특혜를 받아 벼슬을 하여 고위직을 독점했기 때문에 평민들이 벼슬을 해도 높은 자리에 오르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서 조선 초기 정도전이 꿈꾸던 나라는 모두가 실력만 있으면 출세하고 잘 살 수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조선의 양반은 전형적인 계급이 아닌 나라의 직무를 감당하는 관료의 개념이었다. 평민들도 누구나 열심히 공부를 하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고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국력은 갈수록 쇠약해져 갔다. 영조와 정조 시대의 황금기를 지난 조선은 세도 정치가 갈수록 심해져 가고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사회는 사실상 양반과 농민으로 양극화되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해져 갔다. 관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배를 불리고 가난과 수탈에 시달린 농민들은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애서 개화파들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기치로 나름 개혁을 부르짖으며 일어난 것이었다. 개화파는 처음에는 평화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청년들을 모집하여 근대 사상과 문물을 배우게 하고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여 개화의 필요성을 홍보하였다. 그러나 개화파는 명성황후를 배경으로 하는 민씨 정권과 개화에 대한 의견차이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민씨 정권은 청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개화를 추진하자는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의 개화를 돕는다는 구실로 조선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장벽과 위협을 동시에 느낀 개화파는 정치적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을 끌여들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방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자 청군은 개화파를 공격하여 일부는 피살되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개화파의 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민중의 뒷받침이 없는 개화된 일부 양반들의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래서 일본을 끌어들인 것인데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간섭할 수 있는 구실을 얻게 되었다.

청나라의 공격으로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주인의 사망 등 피해를 입은 일본은 조선에 책임을 묻는 동시에 1885년 청나라와 텐진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으로 인해 일본은 조선에 정변이 일어날 경우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결국 개화파의 개혁은 뜻은 가상하였으나 일부 지식인들만의 개혁, 국민이 함께 하지 않는 개혁, 외세를 끌어들인 개혁이라는 한계를 드러낸 일시적 정변으로 그치고 말았다.

 

2. 기독교의 근대화 공헌

(1) 개화기 기독교 전래의 역사적 의미

조선 개화기 선교사들에 의한 활발한 기독교 전래는 단순히 복음의 한반도 진출이라는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조선은 양반과 농민으로 양극화되어 시민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해진 기독교는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뿌리째 흔들었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잠재적인 민주시민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 국가를 뒷받침할 국가적 시스템이 갖춰져 간다는 의미였다.

 

(2) 선교사들의 근대화 노력

좌파 역사학자인 이만열 교수는 일본인들이 조선의 역사자료를 훼손하고 역사를 왜곡하여 진실한 자료를 찾기 위해 미국 도서관까지 뒤져야 했다고 술회했다. 또 중국이 한국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선전하는 등 중국의 한국역사 왜곡을 모두가 규탄한다.

그러나 가장 거대한 역사왜곡은 바로 한국 역사학자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좌파 역사학자들은 한국 근대화에 가장 공헌한 역사적 사실들을 아예 역사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것은 선교사들의 근대화 공헌 사실들이다.

 

개화기 선교사들은 단순히 한국 근대화에 도움을 준 정도가 아니라 한국의 개화를 주도한 세력이었다. 그들은 개화기 한국에서 선생님이자, 기술자, 의사, 건축가, 체육 코치, 시민운동가들이었다. 선교사들로 말미암아 근대식 건물과 병원과 학교 등이 세워지는 등 조선은 가난한 전근대 국가에서 모든 면에서 급속도로 근대 국가로 탈바꿈해갔다. 한국을 건국한 주도 세력들은 대부분 선교사들에게서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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